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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의 기억

내가 기억하는 80년대 초(2)

by 멍뭉이꽃밭 2024.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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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는 뭔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해이기도 뭔가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해이기도 했습니다. 그 때에는 프로야구가 출범했고, 아이들이 다들 리틀야구단에 가입하는 것을 꿈꾸는 시기였어요. 그리고 누군가가 1984년에 세계는 멸망한다는 얘기를 흘리기도 했죠. 죠지 오웰의 1984 소설을 보고 암울한 미래를 상상했던 시절이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내가 기억하는 80년대 초 두번째 이야기는 그 때의 문화들을 얘기해볼까해요.

 

 여름 밤이면 하천 둑에 나와...

 

 제가 살던 월계 아파트는 하천 둑 근처에 있었어요. 지금 푸르지오 라디우스파크 공사하고 있던 그 자리였지 싶은데, 5층짜리 아파트들이 죽 늘어서 있었죠. 우리 집이 45동이었으니까 단지가 꽤나 큰 아파트였을 것 같아요. 지금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그 때 우리 아파트는 연탄 보일러를 사용했었고, 복도식 아파트의 복도마다 연탄 등의 쓰레기를 버리는 구멍이 있었죠. 아마 지금도 복도식 아파트 보면 난간 쪽으로 보면 가로세로 40센치 가량 되는 여닫이 문으로 닫힌 구멍이 보이실꺼예요. 그게 바로 쓰레기를 버리던 구멍이었죠.

 

 그 때에는 대부분 연탄보일러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겨울철만 되면 꼭 뉴스에 한번씩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가족들 소식이 들리곤 했어요. 무색무취의 일산화탄소에 중독되는 것이죠. 겨울에 문을 꼭 닫고 연탄을 피워놓으면 그 알 수 없는 멍함이 있어요. 머리도 지끈지끈해지구요. 하지만 연탄이 집에 있어 좋은 것들도 많았어요. 달고나며 쫀드기며 구워 먹을 수도 있고, 군밤, 군고구마도 먹을 수 있죠. 그래도 항상 그 연탄 위에는 커다란 솥이 놓여져 있고 물을 끓여 썼기 때문에 따로 가습기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답니다.

 

 여름이 되면 집안은 더운지라 다들 대자리, 돗자리들을 들고 하천가 둑방길로 나와요.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고마운 하천 둑방길에 앉아있으면 동네 이웃들을 다 만날 수 있고,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 수도 있어 좋았어요. 대신 하천은 오염상태가 심해서 왠만해선 들어가진 않았죠. 피부병 걸릴 수도 있어서.... 그렇게 하천에서 쉬고 있으면 약장수 아저씨들이 찾아오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약장수 아저씨들은 그냥 약을 팔지 않죠. 반드시 뭔가 쇼를 해줍니다. 한번은 멋진 모자를 쓴 마술사 아저씨가 와서 마술쇼를 보여줬어요. 간단한 카드마술에도 사람들은 무척 좋아했었죠. 또 요즘은 거의 보이지 않는 거인 아저씨 (키가 2미터가 넘는 진짜 거인이예요), 난쟁이 아저씨, 곱추 아저씨 등등 신기한 사람들이 묘기를 부리는 것을 볼 수 있었죠. 그렇게 여름 뚝방은 동네 사람들의 문화생활을 돕는 그런 자연스러운 곳이었어요. 그렇게 9~10시가 넘어가면 더위도 사그라들고, 하나 둘 씩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습니다.

Baseball children membership
각 구단마다 홍보를 위해 어린이 회원을 모집했죠 (사진출처: 동아일보)

 서초동으로 이사를 했어요

 

 아버지 직장 때문에 월계동에서는 국민학교 2학년까지만 있게 되었고, 서초동으로 이사를 하게 됐어요. 낯선 환경에서 새롭게 적응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때의 아이들은 다들 순수하고 착했던 것 같아요. 새로운 친구를 잘 챙겨주고 함께 놀아줬어요. 금새 적응했죠. 서초동의 아이들은 월계동의 아이들보다는 좀 더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아이들이었어요. 전학가기전에 누나들이 겁주면서 얘기했죠. 그 학교엔 "날라리"들이 많다고...

 

 그래도 다행히 저학년때 옮긴 것이라 아이들은 아직은 순수하던 시절이었어요. 그 맘 때쯤 우리 나라에는 프로야구라는 것이 시작되었죠. 기록을 보니 1982년에 출범했다고 하네요. 우리 반 친구들은 하나 둘, 신기한 프로야구 리틀야구단에 가입한 것을 자랑했어요. 단짝이었던 친구는 아버지가 OB에 다니고 있어서 OB베어스의 멋진 잠바를 입고 학교에 나타났었죠. 여러 모양의 곰돌이 캐릭터로 만들어진 스티커도 친구들에게 자랑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옷은 MBC청룡 옷이 제일 이쁘긴 했어요. 고급스런 야구 잠바가 순수했던 소년의 욕망을 일깨웠죠. 어떤 친구는 삼성라이온즈의 파랑 잠바를 입고 오고, 또 어떤 친구는 해태타이거즈의 선수복을 위아래로 맞춰 입고 등교했어요. 해태는 빨간티에 검은 바지라 그 때의 시선으론 좀 많이 파격적이고 웃겼죠..ㅎㅎ 그렇게 친구들은 하나 둘 씩 어린이회원에 등록했는데, 저는 여전히 가입도 못하고 있었어요. 부모님이 비싸다며 가입시켜주지 않으셨죠. 그 때 짜장면이 500원 하던 시절이었는데, 가입비가 5천원이었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7~8만원의 값어치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우울해하고 있다가 결국엔 가입을 허락해주셨는데, 그 결정을 너무 늦게 하는 바람에 아직 가입이 가능한 곳은 롯데 자이언츠 딱 한 군데 밖에 남질 않았었어요. 그래서 가입하러 갔는데, 롯데 로고가 있는 파랑색 티셔츠 하나, 회원증 하나, 연필하고 공책...이게 다 였어요. 다른 구단은 같은 값에 고급스런 잠바와 예쁜 스티커도 줬는데.... 롯데는 이렇다 할 마스코트도 없고...T T. 그래도 그 때부터 전 롯데가 그냥 내 구단이 되어버렸죠. 비록 무지 후진 팬서비스였지만, 인연이 그러하니... 가입은 어떻게 할까요? 지금처럼 온라인 예매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신문이나 잡지에서 기사를 보고 가입접수처를 찾아서 직접 방문했는데, 자그마한 사무실 책상에 어떤 아저씨 한분이 앉아있었어요. 아버지가 돈을 내니 회원증을 작성해주시고 선물을 주더군요. 무척이나 조촐한 느낌...아직도 잊을 수 없네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그 때의 서초동

 

 전학간 학교는 신중국민학교였어요. 월요일 아침 전교생 조회 때 교장선생님이 나오시면 "신중!" 하면서 거수 경례를 했던 기억이 조금 남아 있네요. 우리 집은 학교에서 한참 걸어 내려와 서초중학교 쪽에 있었고, 내 친구들은 대부분이 학교 바로 옆에 있던 소라아파트에 있었어요. 소라아파트는 지금의 방배 레미안 아트힐 자리에 있었어요. 친구들이 다들 거기 사는지라 학교가 끝나면 저는 집쪽으로 가지 않고 친구들과 소라아파트로 갔죠. 아파트에서 상문고등학교 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커다란 공터가 있었어요. 아마도 지금 방배 어울림아파트 있는 자리일 것 같은데... 거기는 우리들의 야구장이었죠. 그 공터에서 친구들과 편을 나눠 야구 시합을 했었어요. 반 대항 시합을 하고 있으면 꼭 예쁜 여자아이들이 구경하며 응원했었죠. 저를 보는 것도 아닌 데, 아이들이 와서 응원하고 있으면 괜히 부끄러워 의기 소침해졌던 일들도 기억나네요.

 

 제일 친했던 친구는 소라아파트를 지나 삼익아파트에 살고 있었어요. 지금의 방배임광아파트 자리였을 것 같은데요, 그 아파트에는 다양한 놀이 시설들이 있었어요. 우리는 "콩콩"이라고 부르던 커다란 트램벌린도 있었고 (지방에선 그것을 "방방"이라고 부르더군요) 맛있는 떡볶이 집도 있었고, 무엇보다 아파트 벽에 네모칸을 그려놓고 야구를 할 수도 있어서 좋았어요. 아파트 옆쪽으로 높은 축대가 있어서 한명은 투수, 한명은 타자를 해도 문제 없었거든요. 그렇게 단짝 친구와 추억을 많이 쌓았었는데, 너무 친한 나머지 한번은 큰 일탈을 하는 바람에 그 친구와 같이 못놀게 되었어요. 저는 어른들 말씀을 곧잘듣는 성격이라 그 친구 어머니가 앞으로 같이 놀지말아라...하셔서 어쩔 수 없이 못논건데, 나중에 그 친구가 제게 와서 "바보!"라고 한마디 하고 가버리더라구요. 마음 아픈 기억이었죠.

 

Computer program data recorder
카세트 형태의 컴퓨터 데이터 리코더(출처: 디지털마켓 블로그)

새로운 세상, 신나는 모험

 

 우리 동네 코스모스 상가가 세워졌는데, 그 곳 1층에 코스모프라자라는 것이 들어섰어요. 삼성에서 어린이들을 위해 퍼스날컴퓨터라는 것을 체험해볼 수 있게 만들어진 곳이었죠. 그곳에서 도스 교육도 하고, 데이터를 읽게 하는 방법도 가르쳐주고 했어요. 그 때 "컴퓨터"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사람들도 무척 신기해했지만, 정작 저걸로 뭘 하는거지? 하는 정도의 정보만 있을 때였어요. 그래도 배우는 것이 빠른 아이들은 금새 컴퓨터로 오락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이전에는 시장 어귀에 작은 게임기들이 있기는 했어요. '벽돌깨기'라고 불리는 알카로이드가 있었죠. 그리고 손에 들고 하는 게임기들이 있었어요. 인베이더, 팩맨 등이 인기였죠. 지금처럼 하나의 게임기에서 여러 게임을 돌리는 게 아니라, 팩맨은 팩맨처럼 생긴 동그란 모양의 게임기에 화면이 있는 것이었고, 인베이더는 직사각형의 게임기에 인베이더 게임이 구동되는 그런 형태였어요.

 

 그랬던 세상에 컴퓨터가 들어오고, 나름 강남의 교육열 높은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퍼스널 컴퓨터를 선물해주셨었죠. 물론 저희집은 그럴 형편이 안되어, 저는 친구네 집에서 신문물을 경험했었어요. 초창기 컴퓨터로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카세트테이프 형태로 된 데이터리더로 리딩을 한 후에 게임을 구동하는 방식이었어요. 대부분이 일본에서 건너온 게임들이라 울트라맨이나 가라테 사무라이 같은 게임들이었는데, 카세트를 연결해서 끼기긱하며 데이터 읽는 소리가 나면 어느 새 게임이 작동이 되는 그런 방식이었죠. 게임기는 게임기 하나에 게임 하나 매칭이었지만, 이 컴퓨터는 게임 테이프만 있다면 여러가지 게임을 할 수 있었어요.

 

 이런 카세트 테이프 리딩방식에서 조금 더 진화한 것이 팩형태를 끼워서하는 타입이예요. 대우전자에서 나왔나 그랬을꺼예요. 키보드 위에 게임팩을 넣는 구멍이 있었고, 팩을 삽입하면 게임을 읽어 실행하는 방식이었어요. 이 때의 게임은 좀 더 진화해서 레밍스나 로드러너 같은 새로운 방식의 게임이 유행했었죠. 팩으로 나오니 게임을 읽는 데 발생하는 에러율도 낮아지고 아무튼 매우 혁명적인 발전이었어요. 그 후 5.25인치 플로피디스크나 3.5인치 디스크 등은 아주 후에 새롭게 등장한 신문물이었어요.

 

 컴퓨터라는 새로운 신문물을 빠르게 접할 수도 있었고, 빨리 배울 수 있었던 환경이 참 감사하죠. 그래서 전 여전히 삼성이란 회사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답니다. 새로운 모험을 할 수 있는 기회, 신기한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은 사람의 인생을 이처럼 바꿔놓는 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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