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기억은 무척 단편적일 수 있습니다. 그 때에는 누구나 시야가 좁고 아주 작은 세계만을 탐구하며,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과의 유대관계만 갖고 있지요. 그래서 그 때의 기억은 아름답게 묘사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제 기억속의 1970년대는 참 느리게 흘러가던 시절이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1970년대 두번째 이야기를 해드릴께요.
하천에는 검은 물이 흐르죠
요즘 사람들이야 물가에 사는 것이 높은 프리미엄이 되겠지만, 제가 기억하는 1970년대의 하천은 소위 "똥물"이 흐르는 곳이었어요. 여름이 되어 동네 아이들과 물가에서 놀라치면 한둘은 피부병에 걸리곤 했었죠. 그만큼 하천은 그리 좋지 않은 기억의 장소였습니다. 저희 집 근처에는 조그마한 개천이 흐르고 있었어요. 기억을 더듬어보니 '한천'이라고 이름이 지어져 있지만, 그때에는 그냥 개천이었어요. 지금처럼 하수가 정비되던 시절이 아니라 집에서 나오는 하수는 개천을 통해 다른 곳으로 흘러 나가지요.
그 개천을 건너는 다리는 통나무로 만들어 놓은 목조 다리였어요. 아마도 국민학교 1학년 때였을꺼예요. 여름 장마철에 큰 비가 내려서 그 목조다리가 잠기게 될 정도로 개천의 수위가 많이 높아졌었죠. 결국 그 다리는 무너졌고, 그 다리를 건너 학교를 가야했던 우리들은 한동안 학교를 가지 못했던 기억이에요. 서울에 목조다리라니 참 생소한 이야기죠? 그 다리 붕괴가 있은 후에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시멘트로 만든 다리가 새로 생겼어요. 그 다리가 어찌나 멋지고 튼튼해 보였는지...
뒷동산은 민둥산
그 무시무시한 통나무 다리는 아이들끼리는 쉽게 건너기 힘든 것이었요. 어른들이 애들끼리 다니지 말라고 당부까지 했었던 다리였죠. 근데 동네에 용감한 형, 누나들은 항상 있는지라... 어린 아이들을 이끌고 그 다리를 건너 민둥산에 놀러간 기억이 있어요. 뒷동산은 어디나 민둥산이었죠. 요즘처럼 나무가 우거진 숲은 생각할 수 없어요. 뒷동산은 민둥산, 바위와 흙으로 덮이고, 그 사이에 간혹 자라는 들꽃들을 볼 수 있지요. 한번 민둥산을 가게 되니 동네 아이들은 자주 그곳으로 놀러갔었어요. 칼싸움 놀이도 하고 여기저기 뛰어놀기 좋았거든요. 그러다가 가끔 유실된 무덤을 비집고 나온 시체를 넣어두었던 관도 발견되고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소름돋는 이야기지만, 그 때에는 그런 것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 것이 발견되면 어른들에게 곧장 말씀드리곤 했죠. 또 그 민둥산에는 유독 삐라가 참 많았어요. 삐라를 줏어다가 경찰서에 가져가면 공책도 주고 연필도 주고 하니 누구든 삐라를 발견하면 무척 신나했었죠. 굉장히 조잡스런 빨간 그림과 종이 질감이 아직도 기억나는 것을 보면 무척 중요한 아이템이었던 것 같아요.
넝마주이 아저씨와 똥푸는 아저씨 그리고 소독차
그 당시 아이들에게 공포를 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넝마주이 아저씨와 똥푸는 아저씨였어요. 커다란 망태기를 등에 짊어지고 동네 여기 저기 버려진(?) 쓸만한 물건들을 담아가는 아저씨가 바로 넝마주이 아저씨예요. 부모님들은 그 아저씨들을 망태할아버지라고 부르셨는데, "망태할아버지 따라가면 꼬추 떼간다"라는 말로 주의를 시켰어요. 간혹 그 할아버지들이 아이들을 데려가는 사건들이 있었는지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항상 신신당부했죠. 그래서 멀리서라도 망태기를 맨 아저씨를 보면 아이들은 소리를 치며 도망갔어요.
지금도 가끔 분뇨를 수거해가는 커다란 트럭을 볼 수도 있는데, 1970년대에는 그런 트럭은 아주 가끔 볼 수 있었고, 대부분 똥푸는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쌓인 분뇨를 처리했었던 것 같아요. 각 집집마다 화장실은 지금처럼 수세식 화장실이 아니라 분뇨통을 땅에 심고 그 곳에 계속 저장하는 "푸세식" 화장실이었어요. 그 화장실이 다 차갈 때쯤되면 이 똥푸는 아저씨를 불러 퍼가게 하시는데, 어께에 메는 분뇨통을 양쪽에 달고 바가지 같은 것으로 퍼갔어요. 그 아저씨가 지나가면 온 동네에 똥내가 진동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멀리서 보고 도망쳤죠.
하지만 소독차 아저씨만큼은 환영을 받았어요. 여름철이 가까이오면 동네 골목을 돌며 소독차가 특유의 소리로 아이들을 불러모으죠. 앙~~앙~~ 하는 소독차 소리가 나면 집에 있던 아이들이 다 골목으로 나와 소독차를 뒤따르는 거예요. 그 때는 몸에 기생충이 많아서였는지 그 소독차의 흰연기 냄새가 참 좋았던 기억입니다.
70년대의 아이들 간식
지금은 '달고나'라고 하면 설탕을 녹여 소다와 섞은 후 적당히 눌러내어 모양을 뽑을 수 있는 설탕과자를 말하지만, 제가 살던 곳에서는 '달고나'는 카라멜과 머시멜레우를 합친 것 같이 생긴 하얀 덩어리를 똑같이 불에 녹여 소다를 섞은 후 물컹해진 것을 저었던 나무젓가락으로 떠먹는 것이었어요. 지금의 '달고나'는 '뽑기'라고 해서 아저씨가 직접 만들어주는 것이고, '달고나'는 아이들이 아저씨 옆에 앉아서 자기 국자를 들고 같이 녹여 먹는 것이었죠. 10원을 내면 하얀 덩어리 두개 정도를 줬던 것 같아요. 그 맛이 '뽑기'와는 좀 다르기에 저는 '달고나'를 더 좋아했었죠. 이 '달고나'의 백미는 다 먹은 후에 물을 조금 담아 다시 녹여 끓여내면 아주 진득한 설탕물이 되어 참 맛났었어요. 지금은 이게 아예 사라져버려서 참 그리울 때가 많답니다.
지금 사라져버려 아쉬운 간식이 하나 더 있는데 요즘 추억의 간식이라며 '쫀디기'가 나오지만, 그 때 나왔던 그 '쫀디기'가 아니라 아쉬워요. 제가 가장 좋아했던 '쫀디기'는 기다란 30센치 자 모양으로 생겨서 무지개 색상이 세로로 나눠져있고 그 중간중간에는 1,2,3,4.... 의 숫자모양이 홈이 파져있던 '쫀디기'였어요. 이게 진짜 맛잇는게, 연탄불에 살짝 구우면 바삭한 과자처럼 되어서 오독 오독 씹어먹을 수 있는데, 지금의 쫀디기는 흉내낼 수 없는 그 얇고 바삭한 느낌이 일품이었던 간식입니다. 다시 볼 수 없어 너무 아쉬워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던 시절...
매달 세금을 내기 위해 은행을 방문해야 했던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걷던 은행가는 길.... 돌아오는 길엔 꼭 상으로 군것질꺼리를 얻었었죠. 빵집에는 단팥빵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느 날 동네에 '곰보빵'이 처음 나왔다며 맛보던 그 기억...('곰보빵'이 지금의 소보로빵입니다. 동네에 한 두분은 파병 군인이나 전쟁 때 몸을 상하신 팔이나 다리가 없는 아저씨들이 있었고, 어른들이 새마을 운동을 해야 한다며 동네 길거리를 싸리 빗자루로 쓸어내던 것을 보며 옆에서 알짱거리며 장난치던 기억들... TV에선 '이웃사촌'이라며 친척보다 더 좋은 이웃을 홍보하고, 실제로도 동네 사람들은 언제든 삼삼오오 모여서 살아가던 이야기를 하던 시절...
집안 일하는 엄마들이 대부분이었던 시절, 엄마들은 다같이 모여 부업을 한다며 인형의 눈을 붙이거나, 자개장에 붙일 자개 조각들 본을 만들고, 한달에 한번씩 오는 반상회에서 서로의 이야기와 먹거리를 나누던 시절. 그리고 가끔 밤에 사이렌이 울리면 등화관제 훈련한다고 창문을 암막커튼으로 가리고 불빛이 새어나갈까 조심하던 시절... 동네 민방위 아저씨가 어느 어느집 불빛 새어나온다고 알려주던 것들...
사람들이 함께 나누고 이야기하고 서로를 위로하던 그 시절, 참 느리게 흘러가던 시절의 기억들이 조금씩 나네요. 소시민들은 참 살기 괜찮았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라는 기억이 그 시절의 기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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