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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우리 집안이 양반 집안일까? - 성씨의 역사

멍뭉이꽃밭 2025. 9. 15.

우리나라의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집안이 양반집안이라며, 조선시대 태어났으면 지배층으로 있었을 것이다 생각들하고 계시죠. 하지만, 현실은 17세기 매관매직, 신분세탁이 있기 전까지는 전체인구의 불과 10%도 채 안되는 사람들만이 양반이었다고 해요. 진짜 대한민국이 조선같은 엘리트 전체주의국가가 아닌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을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90%일텐데요, 오늘은 우리나라 성씨의 역사에 대해 알아볼까해요. 

한국인의 절반이 김씨, 이씨, 박씨라는 놀라운 현실

나의 조상은 누구일까?
자신의 뿌리를 찾아보는 건 정말 관심갖는 주제가 아닐 수 없죠.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외국에서 귀화하여 생긴 성씨까지 합하면 5,582개의 성씨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하는데, 정작 김해김씨 412만명, 밀양박씨 303만명, 전주이씨 260만명 순으로 상위 3개 본관이 압도적입니다.

 

한국인 중 김씨만 해도 천만 명이 넘고, 그 다음으로 많은 이씨, 박씨까지 합치면 한국 인구의 절반 가량을 차지합니다. 영어권이나 일본처럼 성이 다양한 나라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김씨~' 하고 부르면 최소 다섯 명 중 한 명은 돌아볼 만큼 김씨의 비율이 압도적이죠.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일까요?

성씨의 시작: 중국에서 온 '엄마 성씨' 이야기

모계 사회
약탈과 전쟁이 빈번하던 고대 사회에선 확실한 모계의 친족 연계가 유용했을 것이라고 봐요.

 

세계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나라는 고대 중국으로 추정됩니다. 흥미롭게도 고대 중국은 모계 사회였죠. 어머니의 핏줄을 기준으로 한 가족을 이루면서 살았는데, 구성원이 많아지면서 아이들의 양육 주체가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때문에 혈족을 구분하기 위해서 엄마가 살던 지역의 특징을 딴 성을 만들게 됐죠. '성(姓)'이라는 한자를 보면 '여(女)'에서 나왔다는 뜻으로, 그 유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현재처럼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것이 최초 성씨의 역할이었고, 아버지의 씨보다는 어머니의 배가 더 중요한 세상이었던 것이죠.

 

그도 그럴 것이 과거의 남자는 전쟁, 사냥, 약탈 등에 의해 혼동의 시기였고, 여자 역시 이러한 환경에 노출되어 아비가 누구인지 확인이 어려운 환경이어서 더욱이 이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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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씨의 역사: 신라 말기부터 시작된 '격변'

우리나라가 성씨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건 삼국시대, 특히 신라 말기부터로 추정됩니다. "어? 신라 초기에도 왕족 성씨가 있잖아?"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텐데요, 당시에는 '알지', '탈해', '거세' 이런 식으로 이름만 불렸습니다. 나중에 후손들이 보니까 이름만 있는 게 영 허전해 보였던지, 성을 만들어서 붙여준 게 학계의 중론이죠.

 

신라 말기는 당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했는데, 당나라에서는 성 빼고 이름만 부르면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성을 갖지 않고서는 당나라에서 정상적인 활동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당나라와 교류가 잦았던 무역상인, 사신,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성을 만들어 쓰기 시작했죠.

 

그 중 한 명이 바로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을 제패했던 장보고입니다. 원래 장보고는 '궁복'이라는 굉장히 정감 가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중국의 명문가 성씨인 '장(張)'을 가져다가 '장보고'로 개명했다고 하죠.

고려 왕건의 '성씨 대방출' - 사성 제도의 등장

고려의 사성 제도
지방 호족들의 권력이 강했던 고려시대에는 성씨를 부여하여 통제권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보입니다.

 

이후 고려를 만든 왕건이 왕권 강화를 위해 지방 호족과 개국 공신들에게 성을 하사하는 '사성 제도'를 시행합니다. 이때부터 성을 갖는 귀족들이 점차 많아졌고, 성씨는 특권층의 상징이 되어버렸죠.

 

더불어 왕건은 호족들에게 성과 함께 다스릴 땅도 정해주었는데, 이것이 '본관'의 유래가 됐다는 게 일부 학자들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와 달리 봉건제 국가였어요. 지방 자치제와 유사하지만, 중앙 정부의 권한이 훨씬 약한 지방 자치제랍니다. 지방 정부는 자체의 군대도 보유하고 있고, 치안과 행정을 지방 호족이 직접 운영할 정도로 강력했죠. 이러한 봉건제 국가에서 지방 호족에 대한 회유책과 성씨를 바탕으로 한 관리는 중앙 정부의 중요한 정치적 역할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성 제도를 통해 지방 호족들의 중앙 정부로의 소속감과 정치적 회유를 기대할 수 있었죠.

조선시대의 '신분 세탁' 열풍 - 돈으로 사는 양반 지위

조선 초기만 해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성은 로얄 패밀리들이 갖는 특권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10% 가량의 양반 계층만 성을 갖고 있다가, 17세기 이후 갑자기 성을 가진 이들이 급증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공명첩' 때문이었습니다.

 

공명첩(空名帖)은 나라의 재정을 보충하려고 부유층으로부터 돈이나 곡식을 받고 팔았던 허직(명예직) 임명장(벼슬 문서)인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국고를 메꾸기 위해 조정에서 이 공명첩을 대량으로 뿌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독한 체면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양반이라는 신분은 정말 중요했고, 때문에 돈이 있는 상인들은 물론, 집 팔고 논 팔아서 신분 세탁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8세기 족보 위조의 전성시대

조선의 가짜 족보 매매
가짜 족보를 사고 파는 행위가 성행했던 구한말엔 누구나 돈만 있으면 양반 족보를 구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신분제의 변동에 따라 상민이나 천민이 족보를 위조하여 신분 상승을 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8세기 들어서는 족보 위조가 만연했는데, 당시에는 족보가 있어야 근본 있는 집안이라고 인정받았고, 병역 면제라는 짜릿한 혜택도 누릴 수 있었던 덕에 족보 위조 수요는 상당했습니다.

 

조선 후기는 왕권이 무너지고, 권문세가와 외척에 의한 통치가 가능했던 시기라, 권문세가를 등에 업은 호가호위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왕권이 무너지다보니 신분적 위계질서에 상당한 와해가 진행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혼란한 시기를 틈타 번성하는 것은 역시 "사기", "치팅"이죠. 사기꾼들이 넘쳐나 족보를 위조하고 가짜를 만들어내는 시기였습니다. 사기의 방법은 이름 있는 양반집 족보를 빌려다가 위로는 베어내고 아래로는 의뢰인 가족 이름을 넣어주는 게 일반적인 위조 방식이었고요. 성이 없는 사람들은 물론, 성이 있더라도 본관이 좀 약한 양반들도 족보를 위조해서 유명한 집안의 본관으로 갈아탔다고 합니다.

 

1764년 중인이었던 김경희가 족보를 위조 판매하다가 발각되었던 사건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족보 위조는 하나의 '산업'이었던 셈이죠.

일제시대의 결정타 - 민적법으로 인한 '성씨 대혁명'

그러다가 1909년 일제가 민적법을 시행하면서 누구나 성과 본관을 갖도록 법제화합니다.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어 모든 사람이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국민 모두가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다고 하죠. 그 전 조선에는 노예제도 때문에 개똥이 말똥이들이 천지였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일제에 의해 노예제도는 폐지되고 "국민" 모두가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노예제도 하에서의 노비, 백정 같은 이들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죠. 양반 맘대로 생사 이탈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저 양반집에 속한 재산목록에 하나였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시대가 되자 이들이 "국민"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고, 사람으로서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람이 하루 아침에 바뀌진 않겠죠. 평생을 노비로 살아온 사람들은 천지 개벽의 이 사건도 와닿지 않았을테고, 여전히 양반집 노비로서의 삶을 구가하길 원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 나라의 노예 해방은 일제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고, 구습을 답습하려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순사들이 각 집을 돌면서 원하는 대로 성씨 신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반 강제적으로 진행한 결과 전 국민이 성을 갖게 됐습니다. 역사적으로 백성들이 성씨를 취득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가장 잘 팔렸던 성이 바로 김씨, 이씨, 박씨였죠. 첫번째 설은 당시 권문세족이었던 김,이,박씨 집안에 있던 노비들이 자신의 주인집 성씨를 그대로 땄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하고, 또 다른 설은 대부분 이왕 성을 갖는 거 굳이 새로운 성씨를 파서 천민 티를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권세가 있던 안동김씨, 조선 왕조의 성씨인 전주이씨, 오래되고 유명한 시조 설화가 있는 김해김씨와 밀양박씨 등을 선택한 거라고 합니다.

충격적인 결론 - 한국인 대부분은 '가짜 성씨'?

그러니까 누군가 근본 들먹이면서 양반 출신이라고 자랑하면... 음, 구라일 확률이 99.99%라는 뜻입니다. 조선 초기 양반의 비율이 10% 미만이었던 걸 생각하면, 현재 한국인의 절반이 김씨, 이씨, 박씨라는 것 자체가 뭔가 아이러니하죠. 즉, 일제시대 이후 노비 천민 백정들도 성씨를 얻게 되었으니 그 본관을 따지는 행위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인 것이죠. 

 

어떤 이들은 김이박이 아닌 희귀 성씨를 쓰는 이들은 진짜가 아니냐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그 집안의 노비로 있었던 사람들은 그 집안의 성씨를 따라서 등록했다고 하니, 이마저도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따라서 양반이니 천민이니 자랑하고 놀리는 것이 진짜 시대에 뒤쳐진 전근대적인 사고 방식이며, 자유민주주의적 사고와는 반대되는 개념인 것입니다. 주위에 그런 자가 있다면 상종을 않는 것이 현명하다 볼 수 있습니다. 

'천방지축마골피'의 진실 - 또 다른 유언비어

혹시 '천방지축마골피'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천은 무당, 방은 목수, 지는 장의사, 축은 소, 마는 말, 골은 뼈, 피는 가죽을 다루는 백정을 나타내는 천민의 대표 성씨"라는 건데, 이것도 근거 없는 유언비어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조선시대의 천민은 성이 없었으니까 성립 자체가 안 되는 말이죠. 자료에 의하면 축씨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골씨는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피씨 경우 대표적으로 병조 판서와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피득점이라는 인물이 있었고, 마씨 중에도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운 공으로 공신 반열에 오른 마천목 장군이 있죠.

 

일부 학자들은 이 한탄의 소문이 김씨, 이씨, 박씨와 같은 흔한 양반 성씨에 숨어든 천민의 후손들이 오히려 자신의 신분이 들킬까 봐 괜히 찔려서 퍼뜨린 유언비어일 수 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북한에만 있는 특별한 성씨들

한편 남한에는 거의 없고, 북한에만 몰려 있는 성씨도 있습니다. 바로 '개씨'인데요, 한반도 개씨의 95%가 평안도 지방에 편중되어 있답니다. 남한에도 소수의 개씨가 있긴 한데, 대부분 집성촌이 있는 강화도 지역에 몰빵되어 있고요. 그 밖에 북한 지역에 많이 편중된 성씨로 탁씨, 독고씨, 승씨, 선우씨, 현씨, 차씨 등이 있습니다.

마무리: 성씨보다 중요한 것

성씨를 자신의 피가 고결한 피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은 유럽이나 일본에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소용돌이치듯 격동의 세월을 겪은 우리나라에는 부질없는 짓이라는 사실입니다. 확실히 유럽은 성씨를 보면 그 가문을 알 수 있으며, 일본은 성씨를 통해 신분이나 어떤 일을 하는 집안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이 매우 고착화된 계급사회이며, 보이지 않는 사회적 위계 질서가 있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반면에 우리의 다이나믹한 성씨 역사는 매우 역동적인 사회, 매우 건강한 경쟁이 가능한 사회라는 장점을 보여줍니다. 북조선의 김씨 왕조가 저렇게 강력한 위계질서로 수많은 일반 국민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데 반해, 자랑스런 대한민국은 본인이 열심히만 한다면 언제든 성공할 수 있다라는 강력한 역동적 에너지의 분출이 가능한 시스템이었다는 것이, 이 성씨의 역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 점입니다.

 

다만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행태가 전근대적인 엘리트에 의한 전체주의 국가 형태로 향하고 있는 점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자유 민주주의의 다양성과 역동성의 힘을 믿고, 이 힘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눈을 떠야 할 때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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