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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모든질문

마리 앙투아네트는 왜 그렇게 미움을 받을까요?

by 멍뭉이꽃밭 2024.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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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파리 올림픽도 이제 끝이났네요. 우리에겐 좋은 성적으로 기억되지만, 대회 자체는 끝없는 이슈가 있었던 올림픽이었다고 생각해요. 특히 개막식과 폐막식의 기괴함이란....평창올림픽을 능가할 정도였으니까요. ^^. 그 중 머리가 잘린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퍼포먼스하는 것으로 보고 무척이나 충격이었죠. 프랑스인들은 왜 그렇게 마리 앙투아네트를 미워할까 한번 알아보아요

 

Paris Olympics ceremony
논란이 된 파리 올림픽 개막식 퍼포먼스의 장면 (사진: 유튜브)

 

 흔들리던 유럽 사회

 

 중세와 근세의 유럽은, 국가와 왕조, 그리고 신과 같은 왕과 그에게 절대 복종을 해야하는 백성으로 구성되는 한자 문화권의 동양 세계와는 달리 기독교와 그리스 로마의 문화 속에서 어우러진 귀족들의 사회라고 이해하는 것이 우선 필요해요. 왕에 대한 개념도 동양과는 조금은 다른 귀족 중에 선출된, 교회가 인정한 대표의 느낌이죠.(물론 나름의 강력한 권력이 있지만...동양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죠) 특히 신성로마제국과 역사를 같이 하는 합스부르크가의 경우 친인척간의 결혼 동맹으로 유럽 각지에서 영향력을 끼쳐, 유럽의 국가는 따져보면 먼 친척 관계에 있는 왕들이 각자의 지역을 다스리는 상황이라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만큼 국가간의 경계나 왕들의 이질감이 적다는 뜻이죠. 따라서 프랑스의 왕이 영국의 왕위 계승전에 참여하기도 하고 스페인국왕이 네덜란드를 노리는 등의 일들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민족, 국가의 경계가 명확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역사 인식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예요. 흔히 우리가 동화에서 만나본 어느 어느 나라 왕자와 어떤 도시의 귀족 딸과의 혼인 관계들이 이런 역사와 문화의 특징을 이어받은 것이니, 동양 세계에서 생각하는 국가적인 소속감과 응집력은 좀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은 국가와 왕을 위해 목숨바쳐 싸우는 것이 신하와 백성의 도리이지만, 서양에서는 내 가족을 지켜주는 것을 계약(?)한 귀족의 밑에서 함께 싸운다는 개념이 크다고 해요. 그래서 싸우다가 질 듯 하면 협상하고 싸움을 멈추는 것이 서양의 특징이라고들 합니다.

 

 이랬던 유럽사회가 근세로 넘어오면서 점점 왕권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국가주의 개념이 시작되게 되었는데, 그 계기를 바로 태양왕 루이14세부터라고 해석을 해요. 절대왕정의 시대라고 하죠. 쉽게 말해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귀족 평민이 그의 아래에서 국가를 이루고 힘을 기른다는 개념이예요.

 

 사실 그가 이러한 절대왕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그가 등장하기 바로 직전에 가장 유명했던 세계적 사건이 바로 30년 전쟁이에요. 카톨릭을 중심으로 뭉친 세력과 프로테스탄트를 중심으로 뭉친 세력이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인 지금의 독일 지역에서 처절하게 싸운 엄청난 전쟁이었죠. 이 전쟁으로 독일 지역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사람들이 극한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해요. 표면상으론 신교와 구교의 종교전쟁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각 지역의 귀족 세력이 용병들을 이용하여 독일에서 서로의 힘 자랑을 한 것이었고, 이러한 귀족들의 전쟁놀이를 위해 유럽 각지에서 고용된 용병들은 오직 돈벌이를 위해 독일의 이곳 저곳을 떠돌며 30년간 싸움을 했던 것이었어요. 이 과정에서 독일 각 도시는 용병들의 약탈지가 되었고, 참혹하게 파괴되었으며, 부유했던 유럽의 귀족 가문들은 서서히 용병들에게 군자금을 대느라 재정적 압박에 처하게 되었다고 해요.

 

 이런 비참했던 전쟁이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라는 허무한 결과로 끝맺었고, 다시는 이런 멍청한 일은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반성이 일어나던 시점에 새로이 등장한 사람이 바로 루이 14세였어요. 그는 강력한 왕권으로 나라를 안정시키고 그 힘으로 세상을 안정시키겠다는 포부를 가졌었죠. 이와 함께 30년 전쟁으로 독일은 초토화 된 상태였고,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였으니 나라가 빠르고 강하게 성장하는 것은 어찌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어요. 아마도 이 번영기가 프랑스인들이 유럽에서 제일 잘나가는 자부심을 가질만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죠.

 

 부유해진 프랑스의 몰락

 

 루이14세 이후 그의 아들 루이15세는 아버지의 영광을 이어받아 강력한 나라를 통치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루이15세는 그다지 현명한 군주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다복이로 태어나서 그런지 응석받이 경향도 강하고 세상 무서운 것을 모르는 철부지 같은 모습이었다고 해요.

 

 당시 독일 지역에서는 프로이센이라는 새롭고 강력한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고 그 강해진 힘을 이용하여 합스부르크가의 종주국인 오스트리아와의 패권 다툼, 패권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프리드리히2세는 "전열보병"이라는 개념을 명확히 세우고 새로운 전법과 잘 갖춰진 보병전술을 훈련시켜 강력한 힘을 만들어 가고 있었어요. 그는 더욱 강력한 프로이센을 위해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던 슐레지엔 지방을 차지하는 것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죠.

 

 때마침 오스트리아는 샤를6세(카를6세)의 사후 그의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어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물러받는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여자는 왕위를 받을 수 없다는 법 때문에 유럽의 이곳 저곳의 합스부르크가와 피가 섞인 사람들이 너도 나도 "내가 왕이 될 사람"이라는 주장을 하여 혼란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는 혼인을 통해 그의 남편인 프란츠1세를 왕으로 세우고 실권을 행사했지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는 좋은 빌미라 생각하고 이를 문제를 삼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을 일으켜 다시 한번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가게 했어요. 전쟁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중심이 되었지만, 전쟁은 주변국들이 함께 합세하며 판세가 커지게 되었고 이윽고  7년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이 때 유럽의 모든 내놓라는 귀족들이 서로의 계산기를 두드리며 이 전쟁에 참여했는데, 당연히 호기로운 루이15세가 이런 판에 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는 프랑스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시작하였지만 번번히 패하기 일쑤였어요.

 

 또 자신이 자기 국민을 전쟁에 몰아넣어놓고는 정작 자기 자신은 귀부인들과의 파티에서 혼을 뺐으며, 다양한 스캔들을 일으키기까지.... 정말 문제가 많은 국왕이었어요.  당시의 전쟁은 막대한 전쟁자금을 필요로 했고, 제아무리 프랑스의 든든했던 재정이 있다하더라도 이내 파탄나기 일보직전까지 가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루이 15세는 여자와 파티에 사로잡혀 더욱 나라 살림을 거덜내고 있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이런 무책임하고 무능한 국왕인데도 참 복이 많은 사람이었는지, 사랑하는 정부도 두고 돈 쓸거 다 쓴 후 생애를 편안하게 마감했고, 자신이 저질러 놓은 일들을 그의 아들 루이 16세에게 넘겨주었다고 해요.

 

Marie Antoinette, 마리 앙투아네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를 닮아 백옥처럼 아름다웠다는 마리 앙투아네트 (Image by  Pascal  from  Pixabay)

 

 정략 결혼, 그리고 참혹한 결말

 

 어느덧 전쟁은 끝을 맺었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강화를 했어요. 그 평화의 상징이자 대사가 된 것이 마리 앙투아네트였습니다. 마리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끼는 딸이었어요. 그녀를 프랑스의 루이16세에게 보내어 결혼 동맹을 맺으려는 것이었죠. 아무것도 모르는 꿈 많던 소녀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음으로 프랑스 땅을 밟아 그의 남편 루이16세를 만나게 되었어요. 하지만 프랑스인들에게 마리는 원수같은 나라의 미운털박힌 여자에 불과했죠. 그들의 찬란했던 시기를 빼앗기게 된 것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참여하면서부터라 생각하고, 정작 그 일을 벌인 자기네 왕보다는 자기네 군인을 죽인 적국 오스트리아에게 비난의 화살을 보냈으며, 그 와중에 그러한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인들의 욕받이로 쓰기에 너무도 좋았겠죠. 국민의 감정을 이용하여 선동하여 정치적 반사이익을 얻는 행위는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전략이죠.

 

 당시 루이15세의 정부였던 마담 보바리는 루이16세로 정권이 이양되자 권력을 잃게 될까봐 노심초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녀의 이런 권력욕을 지켜줄 묘책은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곤경에 빠뜨려 정치적 이득을 얻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해요. 보바리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까이 지내며 그녀의 이미지에 손상이 가게 하는 투기를 시작했고, 또 다양한 루머와 가짜 뉴스를 만들어내어 대중들에게 가쉽을 던져주었다고 해요. 이로인해 점차 마리는 억측과 루머 등으로 더욱 고립되게 되었는데, 마리 역시 이런 세상의 쓴 맛을 본적이 없던 사람이라 어찌 대처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했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죠. 빵이 없으면 케잌을 먹으면 되지않나라는 유명한 이야기도 이런 과정에서 나온 루머로 알려져있어요. 동양이나 서양이나 약점이 드러난 자를 조리 돌림하는 인간의 본성은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결국 루이15세의 지나친 대외 전쟁과 사치로(물론 루이16세 역시 우유부단한 잘못된 정책을 하기도 했지만...) 파탄난 재정 때문에 귀족가문들의 삶도 팍팍해지니 일반 평민 하층민들의 삶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극도로 쌓여간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만들어내며 "한번만 걸려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해요. 그 와중에 그들의 쌓여간 분노를 불지피는 불쏘시개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이용하기엔 너무도 좋았을테고, 혁명을 주도하던 세력의 대중 선동과 가짜 뉴스로 파리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루이16세와 마리는 오스트리아로의 탈출을 시도하려다 실패하여 이것이 결정적인 단초가 되어 체포 감금되었고, 곧 이어 루이16세가 단두대에 처형되었으며 몇 개월 뒤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차례로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고 해요.

 

 물론 프랑스혁명이 새로운 민중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귀중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되지만, 역사는 승자의 입맛에 맞게 재단되듯이, 이러한 인과관계는 잊혀진 채 혁명의 성과만이 강조된 것이 사실이긴해요. 이번 2024년의 파리 올림픽에서도 단두대에 머리가 잘린 마리 앙투아네트를 조롱하는 퍼포먼스까지 하게 된 것은 뭔가 정치적 의도와 함께 올바르지 못한 역사의식에 기인한 것은 아닌가 하고 보는 내내 씁쓸했습니다.

 

 오늘은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비참한 희생양이 된 마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렸어요.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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